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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각자의 음감대♬/유지의 오독의 나라

[오독의 나라] 오독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지의) 오독의 나라 

- 철저하고 격렬한 오독의 시작, 그 머리말 -





 

※ 연재를 시작하며 패기 넘치는 선전포고(아닙니다)




‘태생적으로 쓸모없는 것에 끌렸고 그 중 내 눈에 가장 쓸모없게 반짝이는 것이 바로 예술이었다. 

이왕 쓸모없는 짓을 하려거든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져 밴드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법적으로 성인이 되고 난 후로부터의(어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상황을 거칠게 정리해보면 위의 두 줄이 될 것이다. 특히 음악과 영화를 사랑했다.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어 글을 썼고 ‘제대로’ 해석하고 싶었다. 나는 ‘정답’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이 강박은 점차 나를 옥죄어 



 즐.기.지. 못.하.게.



만들었고 답을 찾으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멍청해졌다. 불변의 진리나 법칙 따위는 없었고 답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주로 (영향력 있는 혹은 다수인) 타인의 시선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열패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작품이 제대로 해석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결론은 



 ‘불가능하다’였다. 


그 근거는 ‘작가조차 그 작품의 주인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창작한 것은 맞다손 쳐도 그 또한 자신이 낳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의 유전자가 아이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그들조차 자기 자식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따라서 작가의 창작의도와 그것이 발현된 양상을 파악하는 것은 정답이 될 수 없다. 



 작품들은 잡아채어지길 기다리는 부유물이다.  



그리고 그 부유물은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며 생성·변형·소멸을 거친다. 어떤 과정을 겪는지 살펴보자. 먼저 창작당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 개입되고(장르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영화와 같은 경우는 사진적 존재론으로 접근했을 때 더욱 그렇다), 우연은 동의 없이 개입하여 작품을 초기 단계의 머릿속 그림과는 다른 지점으로 가져다 놓는다. 작가의 계획 단계에서의 구상은 완성된 작품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세상에 던져져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유한다. 게다가 작품을 둘러싼 환경 또한 계속 변화할뿐더러, 생성된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그야말로 낚아채어져 시공간적·개별적 인식의 토양에 심어졌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다. 



그 길 잃은 부유물을 잡아채어 가장 적절한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 그것은 '오독(誤讀)'을 통해 이루어진다. 창의적 오독.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 변화하는 시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부유하던 작품은 독자에 의해 해석이 더해지며 또 다른 의미의 창작이 된다. 부유하는 작품들을 가장 빛나는 곳에 놓아둘 수 있는 오독이야말로 정답 이상의 답이 아닐까? 



문학청년이었던 김동리와 서정주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짧은 시 한편.



젊은 동리       

이시영


술이 거나해지자 젊은 동리가 젊은 미당 앞에서 어젯밤에 잠 아니와서 지었다는 자작시 한 수를 낭송했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 미당이 들고 있던 술잔을 탁 내려놓고 무릎을 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이라. 내 이제야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컸네.” 그러자 동리가 그 대춧빛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대꾸했다. 

“아이다 이 사람아.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이다.” 미당이 나머지 한 손으로 술상을 꽝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됐네. 이 사람아!”



오독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시라고 생각한다. ‘꼬집히면’을 ‘꽃이 피면’으로 잘못 들었을 때, 오독에 의해 마술적으로 팽창되는 해석의 지평과 순간적으로 작품이 가닿는 지점을 보라. 소설가이자 시인 한승원 선생은 이를 ‘아름다운 오독’이라 칭하고 “모든 사람은 오독할 권리가 있다.”고 단정해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모든 것이 괜찮아졌고 나는 다시



즐.길.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이제 나는 보다 철저하고 격렬하게 오독하기로 했다. 



매력적인 오독. 

존경을 바탕으로 한 오독. 

간절히 닿길 바라는 오독.



을 지향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백치를 자처한다. 그리하여 ‘매력적인 오독의 여지를 흘리는 작품을 만난다면 작정하고 오독해주지’하는 마음으로 살펴봤더니, 글쎄! 24년간 해온 것이 전부 세계에 대한 오독이었지 뭐야?



모쪼록 오독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