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들 각자의 음감대♬/천방지방의 8090 수퍼마켙

아 마왕

먼 훗날 아주 나이가 들고 나서 내 청춘을 즐겁게 해줬던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6~70년 뒤에 한때 잘 나갔던 야구 선수의 짤막한 부음을 본 상황인 것이다. 노인은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약간의 아련함과 함께 잠시 추억에 젖었을 테다. 그러고는 뒤이어 밀려오는 수많은 소식들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겨우겨우 할 정도였으니 내가 좋아하던 이가 채 날개를 펴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얼마 전 마왕의 소식을 마주했다.

 

존 레논, 마빈 게이, 김정호, 유재하, 김현식, 프레디 머큐리, 커트 코베인, 김성재, 서지원...

 

이 목록에 신... 이름 석 자가 올라간 것이다.

 

신보도 내고 방송 출연도 활발하게 하길래 앞으로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뻐했는데 이렇게 빨리 추모와 추억의 대상이 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식의 먹먹함을 이토록 빨리 느끼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마왕의 곡 하나하나를 새겨들은 것도 아니고 라디오를 꼬박꼬박 챙겨들은 Children of Darkness도 아니다.

 

마왕을 안 것도 고등학교 시절이니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마 넥스트 5집이 나왔을 즈음이리라. 모의고사가 끝난 날에는 야간자율학습이 없었기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래방을 가곤 했는데 거기서 한 친구가 마왕의 곡을 즐겨 부르곤 했다.

 

그 이후로 마왕의 노래를 즐겨듣게 되었으니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이 추천해주거나 부르는 노래를 찾아듣지 않는 편인데 나름 열심히 찾아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즐겨듣는데 그치지 않고 즐겨 부르기도 했다. 대학에 갓 입학해서 까마득한 선배들까지 다 모여서 술을 마실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대에게를 전주까지 흉내내가며 열창했다. 그의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을 직접 보셨을 법한 선배들이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특히 마왕의 성찰적인 가사와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모습을 좋아했다. 무대 의상과 장갑까지 잊지 않은 채 100분 토론에 나와서 조리 있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모습을 보며 마왕을 닮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마왕만큼 목소리가 낮지도 않았고, 생각을 갈고 닦지도 못했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려 애썼던 마왕은 그 때문에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다. 대마초, 체벌, 북한 미사일, 사교육 광고에서 노 대통령 서거 때까지 수없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마왕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때로는 거칠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하지만 올해 오래간만에 신보를 들고 온 마왕의 모습은 예전과 조금 달라보였다. 외모는 한층 후덕해졌고 여유와 함께 약간의 따뜻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중년의 마왕은 어떤 것을 전해줄까 궁금하던 즈음에 우리는 중년의 마왕뿐만 아니라 노년의 마왕 또한 볼 수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왕의 음악과 삶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하는 건 주제 넘는 일이라 그냥 이리저리 지껄였는데 결론은 그가 있어 내 청춘이 더욱 윤택해졌다는 것이다.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고마워요, 마왕!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